나의 이야기

고 김근태 전의원 문상을 다녀와서

검선 2012. 1. 2. 17:59

 

오래전 젊었던 시절 가까이 지낸적이 있었던 고인이 된 김근태 전의원(통합민주당

상임고문)의 문상을 오늘 다녀왔다.

고 김근태의원과 나는 서울상대 1년 선후배 사이이고 대학졸업후 첫직장이던

일신제강 수출부에서도 잠시 함께 근무하며 가까이 지냈었다.

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유신체제 반대운동으로 5년여의 수배생활을 거쳐,

80년대에도 계속되는 군사독재정권에 항거하다가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풀려났으나,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그만 안타깝게도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된것 같다.

물론 그토록 몸바쳐 애썼던 민주화가 실현이된 후 김대중정권과 노무현정권하에서

국회의원 3선과 민주당 당의장, 보건복지부장관을 지내는등 화려한 정치인으로

잠시 두각을 나타내기도 하였으나, 그가 겪은 고초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점도

많은 것 같다. 더 큰 꿈을 이루지 못한채 일찍 떠난 것 같아 매우 안타깝고 아쉬운  

생각이 든다.

그의 도망자 시절, 내가 겪은 에피소드 몇가지 사례를 들어본다.

유신선포 이후 청화대의 강력한 체포 명령을 받은 각 경찰서 수사관들이 혈안이 되어

그를 찿아 다니고 있었다. 그가 나와 같이 다니던 일신제강을 사직하고 난 직후이므로

수사관들은 일신제강 직원중에 누구인가가 은닉해 주었거나, 은닉하고 있는 장소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으로 단정하고 수시로 회사에 찿아왔다. 심지어는 입사동기

여직원 하숙집을 저녁 늦은 시간에 불시 방문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회사내의 경기고교

동창생들은 물론 대학 동문인 나에게도 마포, 종로, 강북 등의 경찰서 수사관들이 번갈아

들이 닥쳤다.

나는 그가 회사를  퇴직한 후에는 전혀 만나 볼 기회가 없었다고 딱잡아 떼어 형사들을

돌려 보내곤 하였다. 그들은 나에게 '당신은 같은 대학을 다녔을 뿐아니라 직장선배 이기도

할 뿐더러 게다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의협심이 강할 것이므로  당신 집에 숨겨주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고  하며 의혹을 품고 집요하게 추궁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나에게 한 번 다녀간 어느 수사관이 나에게 또다시 나타나더니 " 당신! 왜 나한테

거짓말 했오?"하고 내가 마치 범죄인이기라도 한 것 처럼 강하게 따져 묻는 것이었다.

사연인 즉, 많은 친구들이 누구인가 선배 결혼식에서 그를 만난것이 마지막이였다고 증언하길래

최근 결혼한 장본인이 누구인가 확인 해보니 그게 바로 나라는 거다.

나는 시침이 딱 떼고, 나이가 40쯤되어 보이는 그 형사에게 "아저씨 결혼해 보셨어요?" 하고

반문하며, 어처구니 없어해 하는 형사에게 결혼하는 당사자가 누가 왔었는지 어떻게 일일히

다 기억하느냐고 쏴 붙이시다 싶이하여 돌려 보냈다. 실은, 그가 결혼식장에 와서 축하해준

것도 다 기억하고 있었고, 더구나 기념사진 촬영에 그도 함께하였음을 잘 알고 있었으나,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하였던 것이다. 하긴 내가 그로부터 결혼을 축하 받은 사실이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인가?

그들은 고 김의원이 사귀는 여자가 있는가에 대해서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나는 그가 

사적인 일에 관해서는 전혀 입을 열지 않기 때문에 아는 것이 없다고 일축해 버렸다. 잘 모르

기는 했지만 여자 관계에 대하여 나에게 자문을 구한적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이

바로 민주화 운동의 동지이자 5년동안 집에 숨겨주기도한 부인 인재근 여사일 줄이야.

그 때 내 의견을 제의해 준 것이 인여사를 선택하게된 그의 판단에 다소 영향을 주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그 때 딴소리를 했으면 어쩔 번 했는가 생각하니 아찔하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그 당시에 무슨 일간지에 "근태야! 어머니가 위독하시니 빨리 집으로

와다오." 하는 소설가이신 그의 형님 이름으로 낸 광고가 실려있었다. 나는 수사기관에서 낸

위장 광고일 것이라 추측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머님은 암이 온몸에 퍼져 있었으나,

막내인 그를 마지막으로 보고 싶으셔서 버티시고 계셨다고 한다. 10.26 박정희 대통령 서거이후

80년 봄, 유신 포고령이 해제되어 수배자의 신분이 풀려 세상에 나온후 주민등록증 재발급,

예비군훈련 불참 문제등이 다 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참 잘 되었구나." 하시며 숨을 거두

셨다고 한다.

참으로 모정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깨닫게 하시고 떠나신 어머니셨다. 쌍문동에 있었던

그의 본가에서 치루어진 어머님 장례식때 들었던 가슴 찡한 내용이다.

오늘 장례식장에 조문하러가니 그가 숨어지내던 인여사와의 사랑으로 얻은 늠늠하게 장성한 

아들과, 아빠가 병상에 누운채 결국 결혼식에도 참석치 못하고 돌아가셔서 가슴이 찢어질 듯

할텐데도 잘 견디어 내고 있는 딸이 고모님과 함께 문상을 받고 있었다.

30여년전 1980년 초 수배자 생활에서 막 해방된 고 김근태의원의 결혼식에 가서 축하해주었던

시절이 그리 오래지 않은 것 같은데 그 자식들이 모두 그렇게 성장하여 아버지의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와 나도 나이가 꽤 들긴 든 모양이다.

아는 얼굴이 없어 일찍  빈소를 떠나며, 많은 시민들이 남겨놓은  추모 메시지 틈에 나도 한

줄 적어 남겨 놓고 왔다.

 

"목숨 바치신 민주화 운동 영원히 기억 될 것입니다. 존경합니다." 

 

사랑하는 후배님, 모든 것 다 내려 놓으시고 평안히 잠드소서!

 

2012년 1월 2일 

 

이 영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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