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큰 아버지의 첫사랑

검선 2009. 11. 8. 00:19

       큰 아버지의 첫사랑


   내가 큰 아버지의 첫사랑 얘기를 알게 된 것은 약 30여 년 전이다.

  수출회사 초년병 시절, 중동 출장길에 비자를 받고자 일본에 들른 차에, 오래전 일본으로 생활터전을 옮기신 큰 아버지를 어렵사리 찾아뵙게 된 일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해외에 나가기가 어려워 우리 일가친척 중 아무도 일본에 계신 큰 아버지를 해방이후에 만나본 이가 없었다. 나는 해방둥이로 태어났기 때문에 큰 아버지를 만나 뵌 적도 없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일본 동경에 도착하여 왕궁 옆에 있는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큰 아버지 댁에 전화를 드렸으나, 계시지 않기에 전화 받는 젊은 여자 분에게 서울에서 온 조카가 전화 드렸다고 하며 호텔의 전화번호를 알려 놓았다. 내가 일본어를 못해 영어로 통화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전화 받은 분은 내 사촌 형수님이었다.

  얼마 후 식당에서 한참 식사하고 있는 중에, 나를 찾는 전화가 왔다는 방송이 들렸다. 반가운 마음으로 식사고 뭐고 전화를 받으려 방으로 달려가고자 벌떡 일어서니, 웨이터가 쫒아 와서 자리에 앉아 식사를 계속하고 있으라고 하고는 전화기를 가져와 코드를 꽂고 수화기를 넘겨주는 것이었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서비스였다.

  그러나 전화를 받아든 순간 놀라움과 실망감이 겹쳤다. 수화기를 던져버리고 싶을 정도로-------

  "여보세요! 큰 아버님이세요?“하니 수화기 저쪽에서는 “헬로우! 이즈 디스 마이 네퓨 영순? ”하시는 것 아닌가. 아무리 40여 년 전 한국을 떠나셨다 해도 그렇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꾹 참고 영어로 대화한 끝에, 보고싶으니 집으로 찾아 오라는 것이었다. 일본이 초행길인데다 사시는 곳도 다찌까와라는 곳으로 한국으로 치면 인천쯤의 외곽도시여서 잠시 머뭇거렸더니, 찾아오는 길을 종업원에게 상세히 일러 놓으시겠다며 전화를 바꾸라고 하셨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호텔 매니저가 큰 아버지 댁에 찾아가는 요령을 약10개 항목으로 정리한 영어 메모를 건네주었다. “미스터 리가 큰 아버지 댁에  잘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여러 명이 회의하여 작성한 겁니다.“라며--------  

  오래전 일이라 다 기억은 못하지만 예를 들면 1. 호텔정문을 나가서 대기중인 호텔 택시로 동경역으로 간다. 2. 자동판매기에 요금 XXX옌을 넣고 다찌까와 행 기차표를 뽑는다. 3. XXX행 기차를 탑승하여 가다가 XXX역에서 내려 환승을 한다. 4. 다찌까와 역에 내려 북쪽 출구로 나간다. 5.출구앞 오른쪽 공중전화 박스 앞에서 기다린다. 등등등---- 서투른 영어로 작성하느라 여러 명이 밤늦노록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여 어렵사리 만든 모양이었다. 한국의 호텔 종업원들이라면 과연 그렇게까지 친절을 베풀 수 있을까 하며 감탄했던 기억이 새롭다.  

   아무튼 그 덕분에 무사히 큰 아버지를 만나 뵙게 되었고, 일본인이신 큰 어머니, 사촌 형, 누나, 형수, 조카 등을 생전 처음 만나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일본어를 못하고 그들은 영어를 대충 듣기는 하는 모양인데 말은 거의 못하니 대화가 되지않아 피차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큰 아버지께서 영어를 잘 하셔서 그나마 의사소통이 되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시간이 제법 흐른 얼마후 내가 쉬고 있던 2층 다다미방으로 큰 아버지께서 들어오셨다. 밤늦게까지 대화를 하는 동안 한국어 단어를 영어로 자꾸 물어 보시더니, 역시 어려서 한국에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셨기 때문에 놀라울 만큼 순식간에 한국말을 기억해 내시고 한국말과 영어를 섞어서 말씀 하시기에 이르렀다. 일본에 완전히 정착하기 위하여, 또한 자식들의 장래를 위하여, 가급적 한국 사람들과 접촉을 피하고 일본인으로 살았기 때문에 한국어를 잘 못하게 되었다고 여간 미안해하시는 게 아니었다. 비록 서울의 형제들과는 거리를 두고 사셨지만, 사촌형이 동경상대를 나와 이름이 알려진 운수회사 지사장을 역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자식을 위한 삶은 일단 성공하신 셈이었다.              

  새벽녘이 가까울 즈음에 큰 아버지께서 무언가 소중히 간직하여 오신 듯한 뭉치를 꺼내어 펼치시고는 오래되어 바래진 사진을 내게 보여주셨다. 그 옛날 큰 아버지가 학생때 살았던 서울 적선동 집 이웃의 숙명여고 학생 사진인데, 그 여학생을 평생 잊을 수가 없어서 그녀의 사진을 큰 어머니 몰래 감추어 놓고는 가끔씩 꺼내보곤 하셨단다. 이를테면 그 여학생이 바로 큰 아버지의 첫사랑이었다. 50여년 세월 동안을 가슴속에 고이 묻어 두었던, 말만 들어도 가슴 설레는 첫사랑의 여인---------  

  오죽 그립고 답답하셨으면 가족 누구에게도 밝히지 못했던 비밀을 처음 보는 조카에게 털어놓으셨을까.

  사진 속 단발머리 그 여학생은 나중에 들으니, 내 큰 고모이자 큰 아버지의 바로 밑, 여동생의 여고 동창생이다. 큰 아버지께서는 나를 만나보신 후 고향이 그리워지신 탓인지, 내가 해외에 근무하는 동안 두어 번 서울을 찾으셨고, 꿈에 그리던 첫사랑의 여인, 옛 숙명여고생도 만나보셨다고 한다. 평생을 오매불망하던 여인과 살아생전에 덕수궁에서 마지막 데이트도 하셨다니 그 얼마나 멋진 일인가. 

  나에게도 과연 큰 아버지와 같은 아름답고 애절한 옛추억의 첫사랑이 있었던가?

                

 2009년 11월 08일 새벽에

 이 영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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