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아르바이트
국가로부터 지하철 공짜 카드를 받는 지공세대에 편입하기 직전인 나에게 돈이 생기는 모처럼의 아르바이트 제의가 생겼다.
지난 3월 어느 저녁, 퇴직한 직장동료들 정례 모임에서, 한 동료로부터 아르바이트 일거리에 대한 제의를 받았던 것이다.
그 일거리의 내용이란, 상업고등학교 경영학 교과서를 개편하는 일에 참여하는 한 출판사의 교과서 내용 중 한 단원을 집필
하는 것이었다.
원래는 그 동료의 부인이 상업학교 교사로서, 그 출판사로부터 공동저자로 추대되어 의뢰받은 일인데, 전에 그 일을 도와주기
로 했던 대학원생이 그만 일이 생기는 바람에, 그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없자,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고 한다.
백수인 나는 시간이 남아도는 판에 돈이 생기는 일이어서 반갑기는 했지만, 대학생 시절에도 별로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놈이,
졸업한지 40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것도 고등학교 교과서를 쓴다는 자체가 양심 없는 짓이라는 자격지심에,
그 일을 맡겠다고 도저히 나설 수가 없었다.
그 이튿날 아침이 되었다. 다시 생각해 보고 전화를 해달라던 그 동료가 느닷없이 아침 일찍 전화를 해온 것이다. 나는
경영학 공부를 한지도 너무 오랠뿐더러 상업고교생 눈높이에 맞춰서 교과서를 쓰는 일은 더더욱 자신 없다고 막무가내로
고사 하였다.
그 동료는 내가 서울상대를 나와 오랜 동안 기업경영 일선에서 경험을 쌓았고, 해외지사 근무 경험도 있으며, 무엇보다도
겸손한 자세가 있으니, 학교에서 공부만 한 박사과정에 있는 아르바이트생보다 오히려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자신감을
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일을 맡지 않기로 작정하고 있다가, 그만 설득을 당하고는 그의 제의를 수락하기에 이르렀다.
그나마 용기를 내어 그 일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내용면에서 기본적인 이론의 틀만 잡아 놓으면, 그 동료부인이 고교생
수준에 맡게 일부 수정하고, 삽화나 학습요령 등을 추가하여 마무리 한다고 하였고, 또한 그 교과서가 고교생들이 밤을 새워
공부하는 대학입시나 수능시험과는 관계가 없으므로, 설혹 내용중에 불충한 점이 있다고 한들 사회적 물의는 크게 생기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졸지에 일을 떠맡은 그날 밤, 나는 짓누르는 압박감을 못 이겨 밤늦도록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 동료의 부인으로부터 건네받은 경영학 대학교재와 상업학교의 기존 교과서 등 여러 권의 책을 들여다보며 메모
하기를 시작하였다.
새벽 3시쯤 되었을까? 올 것 같지 않던 졸음이 한꺼번에 밀려오기 시작하여, 옳다구나 하며 얼른 잠자리에 들었다. 잠을 좀
잣나 했는데, 눈이 번쩍 뜨여져서 그만 깨고 말았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아침 6시 밖에 안 된 것이었다. 내가 그 즉시 일어나
또다시 작업을 계속한 것은 두 말할 나위 없다.
나중에 그 얘기를 대학동문 친구에 하면서 나의 한심한 소심함을 강조하였더니, 그 친구는 소심 보다는 책임감이 강해서 그런
것이라나? 아무튼 위로의 말을 들으니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시작이 반이라더니, 일단 작업을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그런대로 할 만 하였고, 대학 졸업 후 40년 세월동안 많이 발전되고
체계화 된 경영학을 뒤늦게나마 접하니 새삼 재미도 있었다. 정말 본의 아니게 보람 있는 경험을 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일에 매달려 작업을 하는 동안 나의 평소 백수 생활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우선, 매일 아침 약 1시간 반 동안 공원에 나가서
하던 운동이 중단 되었고, 2주일에 한 번 참여하던 등산모임에도 빠지게 되었을 뿐더러, 색소폰 연습도 나갈 수 없었고, 게다가
부활주일을 앞둔 성주간의 여러 가지 교회행사에도 불참할 수밖에 없었다.
약 20일간을 거의 매일 자정시간을 넘겨 작업을 하고, 또 새벽 일찍 일어나 강행군을 지속 하였다. 학창시절에 책과 그렇게
씨름을 하였더라면 내 인생이 좀 더 낫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열정적으로 작업을 하였다. 어찌하랴? 백수 3년 만에
모처럼 돈이 생기는 일거리가 생겼으니 .............
홀가분하게 일을 끝낸 지금,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그 교과서가 세상에 탄생하여 햇빛을 보는 날과, 내가 3년 만에 모처럼
일하여 벌어보는 아르바이트 대금을 기다리고 있다.
또한 조그마한 나의 노력이 보태진 그 교과서로 공부한 상업학교 학생들이 장차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여, 기업에서
직장 생활을 하거나, 또는 기업을 창업하여 경영활동을 할 때에,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가득하다.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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