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어머니의 마지막 여행

검선 2009. 10. 15. 00:27

 

      어머니의 마지막 여행

                                                                      

                  사람을 찾습니다

*인적사항

 성명: 송숙자(女, 89세)

*인상착의

 신장 150cm, 40kg, 백색원피스(벨트착용) 황토색 반바지, 검정구두, 허리가 많이 휘어짐

 *발생장소

  강북구 수유5동 391-10 인성빌라 201

 *발생개요

  가출인은 --------------외출 후 현재까지 귀가치 않는 것임

 * 연락처

   ---------------------

▶가출인을 보셨거나 거처를 알고 계신 분은 연락바랍니다.


                       서울 강북 경찰서장

 

 (어머니의 웃음띈 상반신 사진과 함께 전단에 실린 내용)

                                                                                                           

  일요일인 어제 오후였다.

교회의 모든 일정을 끝내고, 어머니께 들릴까 하다가 아내가 무릎도 아픈데다 김치 담그느라 힘들어 하여 그냥 집으로 향했던 것이 엄청난 화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오후 3시반경 집에 도착 하자마자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니 신호는 가는데 도무지 받질 않으시는 것 아닌가. 잠시 시간을 보낸 후 다시 전화를 걸어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어머니를 가까이서 돌보아드리고 있는 둘째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어머니한테 가보라고 당부하고 나니  얼마 후 울먹이는 소리로 어머니가 집에 안 계시다는 거다. 날은 곧 어두워질 터인데 어디를 가셨단 말인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수유리 어머니 집을 향하여 당장 차를 몰고 달려갔다. 날이 아직 어두워지기 전에 주변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도착 해 보니 어머니는 수중에 돈 한 푼 없이 지팡이도 그대로 남겨둔 채 현관문도 열어놓고 외출 하신 거였다. 

  내가 도착하는 동안 여동생은 제 남편을 불러 인근 경찰 지구대에 실종신고를 마치고,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고 있었다. 나는 도착 하자마자 주변일대의 길을 빠삭하게 꿰뚫고 있는 매제를 옆에 태우고, 캄캄해질 때 까지 어머니 집 인근을 골목골목 샅샅이 훑어보았으나 허사였다. 4.19 묘지로, 우이동 솔밭공원으로, 옛 살던 집 주변으로, 나중에는 혹시 교통사고를 당하셨나 하여, 종합병원인 한일병원과 대한병원의 응급실까지 확인해 보았으나 환자 중에는 어머니가 안 계셨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지만 날이 어둡도록 도무지 행방을 알 길이 없으니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새벽5시에 출근한 형은 연락받자마자 잠시 다녀갔고, 멀리 대전과 춘천에 있는 동생들에게도 어머니 실종 소식을 즉각 알려 주었다. 멀리서 동동 거리며 안타까워하는 한이 있더라도 알고 있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아서였다. 무슨 일이 어떻게 전개될는지 전혀 예측을 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날은 둘째 매제의 생일이어서 그가 다니는 교회의 몇몇 교우들과 생일 파티를 하고자 모여 있었다는데, 주인공이 장모님 실종소식을 듣고 뛰쳐나가는 바람에 생일파티는 엉망이 되었고, 본인은 생일파티는커녕 저녁도 굶은 채 이리 뛰고 저리 뛰게 되었다. 생일 축하차 모여 있던 교우들도 주인공 없는 생일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모두 우리 어머니를 찾아 나섰으나 허탕만 쳤을 뿐이다.

  자정이 넘어서라도 혹시 전화가 올까하여 여동생만 어머니 집에 남겨둔 채 각자의 집으로 일단 철수하였다.

  아침 일찍 동이 트기를 기다려 모두들 잠 못 이룬 얼굴로 어머니 집에 다시 모여들었다. 대전의 첫째 여동생도 새벽 첫차로 올라 왔고, 형도 새벽에 일을 끝내고 귀가하였으므로, 직장에 발목이 잡혀 몸을 빼지 못하는 춘천의 막내만 빼고, 형, 나, 첫째 여동생과 둘째 여동생 등 네 형제자매가 모두 동원되어, 어머니가 평소 다니시던 곳과 가실만한 곳을 또다시 샅샅이 돌아보았으나 허사였다.

  경찰서에 가서 실종 전담팀을 만나 자문도 구하고, 전단도 발부 받아 인근 지역에 붙여 놓기도 하는 등 할 수 있는 방법은 전부 총동원 하였으며, 어디서든 연락이 오기만을 목을  빼고 기다리기에 이르렀다.

  춘천의 막내는 직장일로 수유리 어머니 집에 오지 못하는 대신 전화로 여기저기 확인해 보기도 하고, 현직에 있으므로 오지랖이 넓은 것을 활용하여 강북경찰서의 사람 찾는 전담팀으로 부터 최대한의 협조를 이끌어 내는 등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오정이 지나서 부터는 점점 불안해 지기 시작하였다. 어머니께서 의식이 멀쩡하시다면 응당 전화연락을 하실 터인데 전혀 소식이 없을뿐더러, 누군가 보호를 하고 있다면 경찰서에 신고를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무러한 연락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같은 빌라에 사는 주민들에게 얻은 소식을 종합해 보니, 어머니께서는 집 앞에 자주 앉아 계시던 장소에 어제도 앉아 계셨는데, 오후1시경 빗방울이 떨어지자 집 쪽으로 가셨다가 5시경 다시 나가신 것이 목격 되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가셨는지는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오후 늦은 시간으로 접어들수록 우리들 모두는 심신이 피로해지며 점차 희망이 엷어짐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더 이상 찾아 나설 곳도 마땅치 않았고 접촉할 만한 기관도 더 없을뿐더러 기력도 빠지고 하여, 그저 각자 마음속으로 “하느님! 제발 우리 어머니가 무사히 돌아오게 하여 주십시오”하는 간절한 기도로써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채, 불길한 예감을 애써 떨쳐 버리며, 온 신경을 전화통에만 쏟고 있었다.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며 일터에서 오후 늦게 도착한 둘째 매제만이 어제 오늘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아 가보지 못했던 창동 쪽 냇가로 나갔을 뿐이었다.

  해는 뉘엿뉘엿 서산을 넘고 어둠이 깔리자, 하루가 또 속절없이 이대로 지나면 어머니 돌아오시기가 점점 더 힘들어 질 거라는 두려움으로 답답함을 넘어 초초해 지기 시작 할 바로 그 때였다. 웬 젊은이로부터 “연세 많으신 노인의 부탁으로 전화 합니다” 하며 “여기에서 기다리고 계시니 빨리 모시러 오십시요” 하는 것이 아닌가. 장소는 신창동의 어느 치킨 호프집이란다.   

 참으로 천상으로부터 들려오는 천사의 목소리 같았다. 우리는 “하느님! 정말 감사 합니다” 하고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마침 둘째 매제가 나가있던 냇가 근처이었다. 모두들 환호하는 가운데 넷째가 제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즉시 택시를 대절하여 연락장소로 가서 어머니를 모시고 올 것을 당부하였다.

 도착하실 시간에 맞추어 모두들 집 앞에 나가서 대기하고 있으려니 택시가 한대 도착하기는 하였는데 언뜻 보니 손님이 없는 빈 택시인 듯싶었다. 나중에 찬찬히 보니 그 안에 어머니가 옹크리고 않아 계시는 것 아닌가. 우리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어머니가 과연 거기 계셨다. 기진맥진하여, 택시에서 내리는 것조차도 여간 힘들어 하시는 것이 아니었다. 사위와 아들이 업어 드리고자 하여도 모두 거절하고는 쉬엄쉬엄 본인의 발로 계단을 올라 집으로 들어 가셨다. 오죽 다리가 아프시면 중간 중간 계단에 앉아 쉬어가며 올라 가셨을까? 겨우 2층을 말이다.

  얼마나 걷기에 지쳤는지 더 이상 걷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자동차가 그렇게 반갑더란다. 모시러간 사위보다도 자동차가 더 반가우셨던가?

“그런데 그 기사는 누구냐?” 하고 물으시는 것으로 보아 경황없이 타고 온 차가 택시인 줄도 까맣게 모르시는 거였다. 이틀 동안 잡수신 것이라고는 바나나 두 쪽과 몇 모금의 물이 전부였던 모양이니 눈은 퀭하였고 몸도 수척해 지심이 드러나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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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간의 행로를 들어보니 이렇다.

  집을 나서서 한참 가다보니 어디가 어디인지 전혀 모르겠고 집 주소는커녕 전화번호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그저 깜깜할 뿐이었다나? 어느 기도원 근처 길가에서 밤을 지새우셨는데 지나가는 이에게 신문 석장만 얻어 달라고 부탁하였더니 감감 무소식이었단다. 두 장은 바닥에 깔고 한 장은 덮을 요량이었던 게다. 기도원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간간히 보여 무서움은 덜 했고, 교회십자가 불빛을 보며 밤새워 간절한 기도로 구원을 청하셨다고 한다. “하느님! 자식들이 걱정하지 않도록 무사히 귀가 할 수 있게 하여 주시고, 감기 걸리지 않도록 하여 주소서”하고 기도를 드렸다 하신다.

  이튿날 아침에는 손자 손녀들이 다녔던 것으로 생각되는 초등학교에 내려와 수돗물로 허기를 좀 때웠는데, 한꺼번에 급히 많이 마시면 체할 수도 있어 아주 조금씩 몇 번에 나누어 드셨다나? 기억력은 작동하지 않았어도 판단력은 남아 있었나 보다. 지팡이도 없이 가까스로 수유3동 옛집 근처를 당도했으나, 그 일대가 재개발이 되어 당체 알아 볼 수도 없었고 아는 이도 만날 수 없었나 보다.

  번동을 거쳐 힘겹게 간 곳이 우이교를 넘어 창동과 신창동이었는데 가는 도중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두어 번 있었다고 한다. 한 번은, 길 잃은 것을 눈치 챈  어느 아주머니가 “혹시 집으로 가시는 길을 알고 계세요?”하고 물어, 모른다고 말하기가 부끄러워 “네” 하고 짧게 대답하고 말았더니, “그 연세에 정말 대단 하십니다” 하며 지나쳤고, 또 한 번의 기회는 경찰차가 다가와서 집에 까지 태워 주겠다고 친절을 베풀었으나 집이 어디에 있는지, 주소는 물론이요 전화번호도 모르겠고 하여, 또다시 창피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극구 사양하였더니, “돈 받지 않고 태워 드릴 테니 안심하고 타셔도 됩니다” 하더란다. 그 때에 “실은 집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고, 전화번호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하고 도움을 청하였더라면 이미 실종신고가 접수되어 있는 터이므로 쉽게 해결되었을 텐데--------- 그만 치매노인 취급을 받을까 하는 자존심 발동으로 험한 고초를 자초하신 꼴이 되었다.

  별로 가진 것도 없으면서 기죽지 않고 살아온 우리들의 기질이 어머니로부터 이어 받았음을 새삼 느꼈다. 그런 기질 때문에 때로는 손해를 보기도 하였지만 말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허리 굽은 노인네가 지팡이도 없이 힘들게 걷는 모습이 안타까웠던지 어떤 가겟방 주인이 나무를 구해와 지팡이를 만들어 주어서, 고마운 마음으로 받고 보니 너무 짧아 사용할 수가 없어서 “짧아서 못 쓰겠어요”하였더니, 적당한 길이로 또 다시 만들어 주더란다. 지팡이를 다시 만들어 달라는 용기는 있어도 기억이 나지 않아 집을 못 찾고 있으니 도와 달라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 차마 용기를 내시지 못한 모양이다. 어쨌거나 세상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위가 모시러온 차에 타는 것이 반가운 나머지 허둥지둥 올라타느라 가겟방 주인이 새로 만들어준 지팡이를 그만 호프집 탁자에 놓고 온 것을 못내 아쉬워하며, 내일이라도 당장 가서 찾아오고 싶어 하신다. 가난 속에서도 우리 오남매를 탈 없이 잘 키워낸 알뜰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신창동 냇가에 당도한 늦은 오후 어느 때인가에 갑자기 섬광처럼 본인 집 과 둘째딸 집 전화번호 두 개가 동시에 생각나셨다고 한다. 그러나 월요일에 한참 일하고 있을 자식들에게 피해줄 것을 염려하여, 해가 지기를 기다려 전화를 하셨다는 거였다. 자식들이 한데 모여 애타게 전화 연락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다. 그 것도 다 자식 사랑의 마음에서 울어 나온 행동이니 어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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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들은 어머니의 전화를 기다리는 동안 각자 “왜 진작 집 전화번호와 주소가 적힌 목걸이나 팔찌를 채워드리지 못했던가?”, “어제 좀 더 일찍 어머니에게 가보거나 전화를 드렸을 것을”, “우리 집에 한 달쯤이라도 모시면서 아버지를 여의신 외로움을 달래드렸더라면” 하면서 자책감에 빠지기도 하였다.

   이번일로 얻은 상식이 있다면 분별력이 없는 아주 어린 아이와 기억이 쇠잔해진 노인( 이를테면 치매 노인)은 앞으로만 가지 절대 뒤돌아 가지 않는 다는 것과 또한 치매노인의 경우 옛날 자주 가던 장소를 어떤 방법으로든 반드시 가고야 만다는 사실이었다. 

  앞으로는 다시 이런 일이 발생 하지 않도록 우리 오남매가 서로 서로 의논해 가며 최선을 다해 70년간이나 해로한 지아비를 잃은 슬픔에 빠진 우리 어머니가 외롭지 않게 지내시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드려야 되겠다.

  어머니께서 말씀으로는 이번이 “마지막 여행”이었다며, 다시는 혼자 집밖에 나가는 일이 없을 거라고 공언 하셨지만, 누가 알겠는가? 기력이 회복되고 난 뒤, 어제 오늘 일은 까맣게 잊은 채 답답함과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언제 또 다시 “암흑의 미로”를 헤매시게 될 런지?

  그 것이 자못 걱정이로다!


2009년 6월 15일 늦은 밤에                

이 영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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