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분노
그날은 늦가을 매우 청명한 날이었다.
우리 산우회 친구들은 모처럼 서울 근교를 벗어나, 멀리 떨어진 계룡산을 등반할 기대감에 밤 잠을 설친채 새벽 일찍 집을 나서,
공주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한시간 반쯤 걸려 공주에 도착한 우리는 우선 그 유명한 갑사에 들렸다. 갑사에 이르는 길엔 아주 오래된 고목들이 쭉 늘어서서
갑사가 역사있는 오래된 절임을 알려주며 우리들을 반기는 듯 하였다.
갑사를 끼고 있는 계곡을 타고 올라가, 계룡산의 주봉인 천황봉과 삼불봉, 관음봉, 문필봉이 보이는 연천봉에 올라, 멀리 차령
산맥줄기와 금강을 굽어본 후, 반대편 골짜기로 내려가면서 백제의 마지막 왕자의 숨결이 어렴풋 느껴지는 암자를 지나 신원사를
둘러 보았다.
실은 우리 일행중에 파평 윤씨가 있어, 자기 고향에 선조들이 심어놓은 유서깊은 유산이 있고, 또한 고택인 종가에서 좋은 술을
마실 수 있다고 자랑하여, 인근 계룡산을 등반하게 되었던 것이다. 등산을 마치고 논산시 노성면에, 호수를 앞에 둔 경관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宗學堂이라는 곳을 둘러보니, 약 삼백오십여년 전에 설립하여 후학을 길러낸 역사있는 유적지란다.
처음에는 윤씨 후손들을 가르치는 시설로만 운영 되었으나, 나중에는 개방하여 일반 중인의 자식들도 가르쳤다고 하니, 말하자면
그 옛날 그 시절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 역할을 훌륭히 치루어낸 셈이다. 그 배움터에서 40여명이 과거급제를 하였다고
하매, 아직도 글읽는 소리가 낭낭히 귓가에 스치는 듯도 하였고---------
종가집에 들려 푸짐한 점심상에 둘러앉아 맛갈나는 음식과 함께 그날 등산행의 주 목적 중 하나인 젖내기 술에 흠뻑 빠지고 나서,
고택의 대청마루에 걸린 일필휘지 명필휘호도 감상하고, 규수가 방문을 열어젖혀 낮은 담 너머로 몰래 정분을 나누었음직한 안채의
외딴방도 돌아보고, 방문객들과 시조도 읊고 열띤 토론도 하였을 사랑채도 둘러보며, 옛 선조들의 멋과 정취를 흠뻑 느꼈을 때
까지는 기분이 한껏 고조되고 좋았다.
허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귀경길에 그만 문제가 터질 줄 그 누가 알았으랴.
음식도 많이 먹고 술도 제법 마시고 하여, 유사시 볼 일을 대비한다는 이유로 귀가 길은 값이 저렴한 고속버스를 마다하고, 값비싼
새마을호 기차를 타고 논산역을 출발하였다.
맨 앞칸에 좌석을 배정받은 우리는 술기운도 있고 피곤하기도 하여, 느긋하게 두다리 쭉 펴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귀경길에 오르
고 있었는데, 총무일을 맡고 있는 친구가 앞에 나서서 그날 걷은 회비가 값비싼 기차표를 사느라 돈이 모자라게 되었다며 만원씩 더
추렴하고 있었다. 하필 이때 키가 크고 체격이 우람한 여승무원이 우리앞에 나타나서는 다른 승객들에게 피해가 안되도록 조용히
하라는 것이었다. 말은 맞는 말이었지만 우리가 소란을 피운 것도 아니고 단지 회비를 걷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딸자식 보다도
나어린 승무원이 그것도 고압적인 자세로 지시하듯 주의를 하자, 평소 점잖던 총무가 분통을 터트렸다.
별로 소리를 크게 내지도 않았을 뿐더러, 서비스 업종의 승무원이 친절하지는 못할 망정 어디 어른들 한테 공손하게 예의를 갖추지
못하고 함부로 대하느냐고 큰 소리로 호통치며 나무랐던 것이다, 야단 맞은 여승무원이 물러난 잠시 후, 기차내에서 조용하라는 안내
방송과 더불어 빨간 조끼를 입은 자가 느닷없이 우리들 앞에 나타났다. 그 자는 한 술 더 떠서 "조용히 하지 않으면 당장 하차 시키
겠습니다" 하며 으름장을 놓는 것 아닌가.
평소, 띠두른 노조라면 알레르기를 갖고 있는 우리들을 대변하여, 그 날의 주인공격인 파평 윤씨 가문의 친구가 나서서 분기탱천
한 큰 목소리로 "네가 뭐하는 놈인데 복장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와서 하차니 뭐니 하며 우리들을 함부로 협박하는 거야" 하며 호령
호령 일갈 하자, 사태가 수습이 안될 정도로 악화되기에 이르렀다.
논산역에서 한 정거장 지난 서대전역에 도착하자 빨간 조끼는 출발을 지연시키며 우리에게 하차를 종용하였다. 하차를 거부하니
청원경찰 너댓명이 동원되었고, 밀고 밀리고 하던 승강이를 피운 끝에 드디어는 항의에 앞장 섰던 목소리 높힌 친구 둘이 강제로
끌려 내려가게 되었다. 이어서 나머지 다섯 친구들도 주섬 주섬 따라 내릴 수 밖에_________ 두명만 남겨놓고 갈 수는 없었으니까.
기차에서 내려 정신 차리고 보니, 우리가 같이 끌고 내렸던 빨간 조끼의 노조 승무원 녀석은 어느새 기차를 다시 집어 타고 사라져
버렸다.
공안실인가 뭔가하는 사무실에 당도하니, 경찰이 나타나서 상황을 파악하고는 별일 아닌 것으로 판단 했는지 청원경찰에 일임
하고 그대로 가버렸다. 목소리 큰 두 친구는 하차 당한 일에 분이 풀리지않아 애꿎은 청원경찰들에게 시시비비를 따지며 호통치고
하는 사이 시간만 속절없이 흘렀다.
사태를 빨리 수습하고자 총무친구가 청주의 모 기관에 근무하는 딸에게 연락을 하자 당장 달려 오겠다고 하여, 그럴 것 까지는
없다고 만류하느라 오히려 진땀 빼는 해프닝도 있었고, 파평 윤씨 친구는 "우리가 대한민국 경제발전에 얼마나 공이 많은 사람들
인데, 우리가 낸 세금 덕에 편히 살고 있는 너희들이 우리를 이따위로 취급할 수 있냐" 며 노기어린 목소리로 토로 하기도 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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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게 아니라, 우리 일행은 대기업 무역상사맨 수출 역군으로 한 몫 한 친구, 중동의 열사를 누비며 건설 수주에 열정을 바친
친구, 해운업에 종사하며 전 세계를 안방처럼 누빈 친구, 미미했던 전산업종을 오늘날이 있도록 기초를 닦는데 일조한 친구, 제조
업에 종사하며 우리의 산업 발전에 일익을 담당했던 친구등등 우리 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했던 인물들이다. 대부분 수많은
직원들을 이끌며 회사를 경영했던 사장 출신들이기도 하고-------
아직도 나어린 노조 세력들이 이념갈등, 세대간의 갈등을 일으키며 득세하고 있는 꼴을 그만 참지 못하고, 술 한 잔 걸친 김에
목소리 좀 높혀 젊은이들의 잘못됨을 야단치고 호통치다가 오히려 갖은 수모와 망신만 당한 서글픈 노인꼴이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기차 승무원, 청원경찰, 경찰 그리고 다른 승객들이 보기에는 할 일없는 노인들이 평일에 등산하고 귀가길에 술에 취하여, 기차
내에서 단순히 음주소란을 피운 것으로 여긴 것이 틀림없다.
오호통재라! 어찌타 우리가 이런 지경에 이를 처지가 되었는가-------
결국 세시간쯤 억류된 후, 경찰 두명이 와서 발부한 "음주소란죄" 오만원짜리 벌과금 쪽지에 총무친구가 서명을 하고 나서야
귀경길에 오를 수 있었는데, "부러지면 부러졌지 꺾이지는 않겠다"며 호기부린, 뼈대있는 파평 윤씨 자손은 "잘못한 일이 없는데
서명은 무슨 얼어 죽을 서명이냐"며 벌과금 쪽지를 경찰에게 내팽개치고는 끝내 서명을 거부했다.
노론에 밀려 숙청을 피하고자 지방으로 내려가 있는 동안, 숙종왕이 내리는 우의정 벼슬을 온 갖 구실을 내세워 스무번 가까이
고사했다던 소론 출신 파평 윤씨 선조의 피를 그 친구가 과연 이어 받기는 받았던가 보다.
서울 용산역에 도착 하자마자 두명의 열혈 지사(?)들은 그 때 까지도 울분이 풀리지 않았던지, 산우회 회장과 더불어 위로주
한 잔 하러 생맥주집으로 향한 모양이었다.
2008년 11월
이 영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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